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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의 국내여행기/경상도

안동여행 한옥 고택 체험 농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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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여행 중 농암 이현보선생의 고택 농암종택에서 1박을 하였어요.


한옥스테이! 안동 여행을 계획 중에 있는 분들께 감히 추천 드려봅니다. ^^b


오래 전부터 한옥스테이를 꿈꿔오던 찰나에 농암종택을 알게되어 바로 예약하게 되었어요.


농암종택의 경치는 정말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어요~~



농암종택의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한번 담아보았는데 한번 훑어보실래요? ㅎㅎ 



저희는 안동여행을 총 2박 3일의 일정으로 다녀왔어요.


첫째날은 월영교가 있는 안동 시내쪽에 있었구요~


둘째날은 하회마을을 갔다가 농암종택에서 1박을 하는 일정으로 다녀왔답니다. ^^b


하회마을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 농암종택에는 밤 9시경 도착했답니다. ㅠㅜ


도착해서 관리자분의 말씀을 듣고 바로 방으로 들어왔어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방(=사랑채 내실)이였어요. ^^


오자마자 눈에 띄는 차 다도세트! ㅎㅎ



세월이 느껴지는 고가구가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어요


가구 위 전기포트와 탁상스텐드가 무언가 과거와 현재가 만난 느낌이랄까요 ㅎㅎ



무거운 솜이블이 켜켜이 쌓여져 있는 것을 보니


진짜 시골집에 온듯 했어요~


옆 방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과 부모님이 묵었는데


방문할 시골할머니댁이 없다면 체험으로 와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뜻한 메밀차를 우려내어 잔에 따르고 있자니 더 차분해지는 느낌이였습니다


뒤에 보이는 책들도 한권 집어들어 읽게 되는 곳입니다



언제부터 사용된 난방기구일까요~


그래도 작동이 잘 되는 덕에 따뜻한 구들장에서 한숨 잘 잤답니다! ^^b


한지를 내리면 쏘옥 감추어 집니다.



제법 쌀쌀해서 긴바지와 챙겨온 외투를 꺼내입고 종택 부근을 둘러보았습니다.


뒤에 보이는 곳이 사랑채 입니다.


농암종택 외엔 그 무엇도 없는지라 기와끝에 달려있는 빛에만 의존한채 다니는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시골은 해만 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 많이 있을 듯 합니다.



이 문 하나로 야외와 내부가 나뉘어집니다.


생각보다 찬바람을 잘 막아주는 창호문이였어요.



저희 둘의 신발도 고무신 옆에 나란히 놓아보았는데 앞이 왜인지 고무신 모양과 흡사합니다. ㅎㅎㅎ



아파트, 상가들의 불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곳.


하늘과 산, 종택만이 존재하여 별을 보기에 금상첨화 였습니다





하늘에 이렇게 수많은 별이 있다는 것을 이 날 알게 된 듯 합니다.



하늘을 찍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고, 너무 아름다워서 고개만 위로 향하고 있었답니다.



따뜻한 바닥에 잠자리를 준비해놓고 나갔다왔기에 바닥은 더욱 뜨거워져 있었어요.


아~ 이것이 시골 전기구들장의 위력인가요~ ㅎㅎ


따끈따끈하니 너무 좋았아요.


찜질방에 온 그런 느낌도 살짝 들었답니다. ㅎㅎ



<한옥에서의 하루>


수건에 적힌 글에 대답을 하게 됩니다.


"참 좋은 하루였다!"



옛 창은 그대로 살려두고 안쪽에 모기장을 설치한 모습


나무와 스텐의 만남 ㅎㅎ



이 곳은 화장실 입니다.


추웠지만 생각보다 깔끔하며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었어요.


옆방의 소리가 들리기도~ ㅎㅎ


한옥이라 이런건 살짝 취약한 점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한옥이 더 많은 것을 저희에게 줬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아침에 깨어나 창문을 열면 보이는 풍경


햐아~~~~~~~~~


그림인지 엽서인지 영화의 한장면인지 헷갈릴 정도 입니다.





이제 한번 나가볼까봐요~ ㅎㅎ


다시 보아도 고무신 같은 우리들의 운동화;;


구두를 신었거나 불편한 신발을 신었을때 가까운 거리는 이 고무신을 신어도 된답니다. ^^b



방을 나와 저희가 있던 다실이랍니다.


다실은 사랑채 객실과 사랑채 내실로 나눠져있구요~



여기가 오른편에 있던 사랑채 객실입니다.



여기는 사랑채 내실


저희가 묵은 곳이랍니다. ^^



오른편에 유리샷시로 되어있는 곳은 안채 입니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한옥의 멋


여기는 사랑채(사랑방)의 출입문이에요.





안채 뒷쪽으로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답니다.


아~ 장독대도 참 정겹네요. ^^



밤에 도착해서 자세히 둘러보지 못한 종택,


대문에서 본격적으로 둘러 보려고 합니다. ^^


아참 이곳에도 숙박을 할 수 있는 방이 있답니다. ㅎㅎ


대문 좌우로 좌측방과 우측방이 나눠져 있어 숙박이 가능한 곳이랍니다.



'택고생선암농'


농암선생고택 ㅎㅎ



컴컴하고 무서운 느낌도 있었던 곳인데 오전에 보니 이렇게 더 아름답습니다!!!



까맣기만 하던 산이 경이롭습니다.



기와장식이 된 데크에 의자가 놓여져 있어서 앉아보니


세상에!!!! 뒤에 절경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깎인 절벽과 흐르는 강, 수많은 나무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종택과 자연만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곳은 긍구당 입니다.


이 곳도 강이 보이는 참 예쁜장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채 입니다



문을 열고 나와 바라보는 경치가 참 아름다울 장소입니다~



옛날 옛적엔 이 장소에 어떤 분들이 다녀갔을까요?


세월이 느껴지는 기둥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즘은 도심에서도 보기 힘들어진 참새


짹짹~ 지저기는 소리가 어찌나 듣기 좋던지요. ㅎㅎ





긍구당에는 멋진 무늬의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평화로웠습니다.


숙소 안은 보지 못했지만 이 테이블 자리만으로도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앉아있으면 보이는 낙동강 입니다.


인기가 많은 강각과 많이 닮아있는 뷰인데 저는 이곳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SNS에 올려놓은 곳은 거의 강각이고 이 긍구당은 많이 언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숨은 뷰 인가봅니다 ㅎㅎ



이현보선생 초상화와 관련 글이 적혀있는 액자를 발견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긍구당은 1370년경 건립된 역사를 지닌 건물로 본래 이헌이 고려 말에 창건하여 접객별당으로 사용하던 것이고

그 뒤에 이현보가 중수하여 당호를 긍구당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방은 모두 뒤편에 두고 전면 3칸은 누마루로 꾸몄으며, 마루 끝에는 궁창난간을 돌린 형태입니다.

누마루 밑에는 나무기둥을 받쳤으며 방의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규모가 작고 꾸밈새가 검박하나 전면에 큰 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는 집입니다~

이 집은 원래 도산면 분천리 널찍한 후원에 담장도 없이 여유있는 배치형식을 하고 있었으나, 1976년 안동댐 수몰로 도산면 운곡리로 이건되었다가, 

2004~2005년 ‘농암종택 복원사업’이 도산면 가송리에서 추진됨에 따라 긍구당이 농암종택 내부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곳은 농암선생이 돌아가신 곳(명종 10년 1555년 89세) 이기도 합니다.



그덕에 이렇게 저희도 긍구당을 접해보게 된 것이겠지요~


정말 마음에 드는 장소였습니다.


농암종택긍구당


특히나 하늘도 깨끗해서 기와 끝자락과 참 잘 어울리는 날이였어요.


긍구당


이곳도 역시나 고무신 ㅎㅎㅎ


아담하고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긍구당 이였습니다.



"새참드세요~~~~" ㅎㅎㅎ


이런 종택에서도 조식을 신청할 수가 있는데 저희는 아주머니께 특별한 메뉴를 건내받았습니다.



바로 배추전과 갖은 반찬들~!!!


방에서 말고 밖에서 멋진 산새와 함께 먹자고 결정했습니다!


조식메뉴는 아니니 이 점 참고해주세요~



앉아서 배추전을 먹으며 바라본 풍경입니다


종택과 나무와 잔디, 산과 하늘!!!!!!!!!


이런 곳에서 배추전이라니! ㅎㅎ


멋진 풍경을 벗삼아 배추전 아주 잘 먹었습니다~ ^^b



배도 채웠으니 다른 곳으로 한번 가봐야겠지요. ㅎㅎ


여기는 명농당 앞의 잔디밭? 이랍니다.





노랭이 꽃들이 많아서 뭔가 비쥬얼적으로는 귀여워 보였는데


잔디를 가꾸는 분들은 이런 걸 보면 참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겠지요? ㅎㅎ


명농당


담장 넘어로 보이는 명농당


농암종택명농당


1501년 농암 44세, 고향에 명농당(明農堂)이라는 조그만 집을 짓고 벽 위에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


그리고 4년 뒤 49세에 잠시 휴가를 얻어 명농당에 들러 시를 써서 붙이고 다시 한 번 귀거래의 의지를 다졌다.


그렇지만 아직 부모님이 계시어 그만 둘 수 없다고 했다.


  1542년 농암은 드디어 임금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계에 은퇴했다.


어버이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임금은 친히 접견하고 금서띠(金書帶)와 금포(錦抱)를 하사했다.


이 시기는 첨예한 사화(士禍)의 시대였지만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일제히 은퇴식장에 참가하여 이별 시를 지어 선물했다.


이 날의 은퇴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져서 담장처럼 둘러선 구경꾼들이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입니다.” 라고 찬탄하였다.

  농암은 은퇴의 기쁨을 도연명의 귀거래에 비유하고 그의 귀거래사를 본 받아 효빈가(效?歌)라는 감격적 소회의 시조를 읊었다.


기록은 이러하다.

 

  “1542년 가을. 농암 늙은이 비로소 인끈을 벗고 국문(國門)을 나와, 한강기슭에서 친구들과 이별하고 돌아가는 배를 탔다. 


술에 취해 배 안에 누우니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문득 도연명의  ‘배는 표표히 바람에 나부끼고’의 구절을 읊조리니,


돌아가는 흥겨움이 더욱 깊어져 스스로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에 노래를 지으니, 이 노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 받은 까닭으로 효빈가라 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마루 현판 기문(記文)의 글씨는 농암선생 친필이며 ‘명농당’ 글씨는 미수 허목이 썼다.


그 원본은 국학진흥원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


(출처: http://www.nongam.com/ 농암종택 홈패이지)



분강서원의 정문 유도문


분강서원


분강서원


분강서원은 1699년 후손과 사림이 농암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다.


강당 흥교당은 교실이며, 흥교당에 딸린 방 성정재는 교장실이며, 동재는 학생 기숙사, 서재는 교무실 겸 선생님 방, 한속정사 건물은 행정실이라 보면된다.


지금 분강서원은 '창원일기, 복원일기, 분강영당영건소계첩, 영정개모일기, 임사록, 전장기, 부소기, 청선액소, 진설도, 홀기 등 많은 자료가 남아 있어 서원창건과 운영 사항을 잘 알 수 있다.


구조는 위패를 모신 숭덕사를 비롯하여 강당 흥교당과 성정재, 동재 극복재, 서재 경서재, 그리고 고직사로 되어있다.


편액은 성세정, 상량문은 옥천 조덕린, 봉안문은 동리 김화, 분강서원기는 장진이 썼다.


단산 김종구의 '향사참석소감문을 소개한다.


"아! 우리 효절공 농암 이 선생은 국가의 동량이었다. 3조정을 거치면서 왕실을 보좌하여 태평세월을 이루었다.


벼슬은 정승에 올랐다. 시골로 은퇴했지만 벼슬이 내려와 재야재상이 되었지만 강호자연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다.


당시 퇴계 이선생이 도산에서 강학하며, 선생을 선진장덕으로 존경하여 많은 왕복 시문을 남겼다.


퇴계선생이 애일당에 올라 시를 지은 것이 있으니,



고대 새 구비에서 가을을 감상하고,


손으로 국화를 꺾으면서 갈매기를 마주한다.


덕을 우러러 본 지금 맑은 밤 꿈결같이,


밝은 달이 다시금 물속에 떠오른다.



외우고 감상하니 완연히 농암선생의 도학풍절이 백세사표가 되고,


하늘이 강호의 뜻으로 기르려고 함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전에는 효절공의 분강서원이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난 무진년에 국법으로 훼철되어 잡초 우거진 황폐한 터전이 된지 이미 100여 년이 되었다.


지난봄에 선생의 종손 용구씨가 이를 탄식하며 향중에 발의하여 사람이 이에 새로 서원과 사당을 복원했다.


서원은 넓고 아름다워 선생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해마다 향사를 치르니 자손이 그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선생의 도를 잇고 그 찬연함을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밝히게 되었다.


종구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감회가 없지 않아, 삼가 시 한 수를 지어 백세의 고경한 사상에 붙여두고자 한다."


출처: 농암종택 분강서원의 안내글



동재인 극복재 입니다.


현대의 학생기숙사로 보면 되겠습니다.



이 곳은 서재 경서재 입니다.


현대의 교무실 겸 선생님 방이라고 하네요.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위패와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분강서원의 사당이다.


순조 27년(1827)에 건립되었으며 원래는 도산면 분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5년에 도산면 운곡리로 옮겼다.


그 후 2005년 농암유적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


현재의 사당은 신문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담장은 토석담장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우물마루로 바닥을 깔고 벽에는 농암의 영정을 모셨는데 경상도 관찰사 시절의 모습이라고 한다.


1800년대 건물이지만 고식이 잘 남아 있다.

(출처: 농암종택 농암사당 안내문)



다른 곳에 있는 건물들이 안동댐 건설로 인해 옮겨오면서 현재의 규모로 더 넓어진 듯 합니다.


긍구당도 그렇구요.



중간에 있는 문을 지나 한속정사로 넘어왔습니다.



오른편이 한속정사의 바깥채이구요.





산을 등지고 있는 이 곳은 한속정사의 안채 되겠습니다.


이 곳은 몇일 숙박을 하기에도 참 괜찮을 듯 해보입니다.



한속정사를 지나 신도비가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농암 신도비


이 비는 조선 명종 20년(1565) 2월에 세워진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신도비 이다.


그는 인제현감 이흠의 아들로 연산군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산도관찰사, 지중추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효절이다.


비신의 높이는 1.9m이며 폭은 0.84m이다.


재질은 대리석으로 용모양의 비머리가 없이 귀부위에 비신만 얹혀져 있고,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으로 다듬어져 있는 규비 형식이다.


비문은 인재 홍섬이 지었으며 여성위 송인이 썼다.


이 비 아래 자운재가가 있어서 농암의 묘소를 지키고 있다.

(출처: 농암종택 농암 신도비 안내문)


농암종택강각


마지막으로 농암종택 하면 가장 유명한 곳이죠.


강각이 있는 곳으로 한번 가보실께요. ^^b


다른 건물들에 비해 좀 떨어져있는 이곳은 과히 최고의 풍경을 자랑합니다. 



왼쪽 좁은 길을 따라가면 내려가면



강각의 주축돌이 보이고 농암각자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돌의 정면 쪽 사진을 못찍었네요;; 허허



농암각자 (유형문화재 제 43호)


이 각자는 앞면을 다듬은 네 개의 자연석 암벽에 '농암선생정대구장' 이라고 두 글자씩 음각으로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도로개설로 인하여 농암선생의 정자인 애일당을 영지산 윗쪽으로 이전하면서 처음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새겨놓은 것이다.


원래 분천리 옛 애일당 터에 있던 것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글자부분만을 잘라 옛 애일당 아래로 옮겼다가 2005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농암'은 원래 이현보가 태어나고 자란 분천 강가의 큰바위 이름이었는데 훗날 이것으로 호를 삼았다.


그는 혼란했던 세상 속에서 이 바위처럼 귀먹은 듯 초연히 살기를 원했다.


농암은 45세 되던 해에 이 바위[농암] 위에 애일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75세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농암이 있는 분천 강가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다가 이 곳 분천에서 삶을 마쳤다.




담장 넘어로 보이는 강각과 애일당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말이 필요없는 경치



웅장한 강각과 애일당의 모습이 산 비탈의 절경과 잘 어울립니다.



애일당


이 건물은 농암 이현보의 별당건물이다.


조선 중종 7년(1512)에 부친과 숙부 등을 중심으로 구노회를 만들고 경노당을 지어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당호는 부친이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낀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하였다.


1975년 옮기기 전에 애일당은 분강과 의촌이 내려다보이는 농암이라 불리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 '농암선생정대구장'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북서쪽은 산이고 앞면은 절벽이어서 남쪽에 문을 내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뒤쪽 양옆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앞쪽 4칸은 모두 대청으로 꾸몄다.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도산면 분천리로 옮겼다가 2005년 이 곳으로 다시 이건하였다.

(출처: 농암종택 애일당 안내문)





공사니 뭐니해 왔다리 갔다리 건물도 이런 고생을 하는 군요;;;



강각


마지막으로 농암종택의 강각 되겠습니다.



강각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


농암의 자연사랑은 지극했다. 그래서 퇴계는 농암이 지은 '어부가' 발문에서 "아! 선생은 바라보면 신선같아 진실로 강호의 진락을 얻었다"고 하고,


자신이 그 진락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진락'은 자연 사랑이고,  그 사랑의 함축이 류상곡수의 풍류이다.


'류상곡수'는 지난날 최고품격의 풍류모형이었고 자연 사랑이었다.


애일당, 강각 아래 분강의 기슭에는 '귀먹바위'-농암이 있었고, 강 가운데는 자리바위-점석-이 있었다.


농암은 퇴계와 이 바위에서 펼쳐진 유상곡수의 풍류에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을 연출했다.


<농암집>과 <퇴계집>에 이런 글들이 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달빛에 물빛은 흐릿한데, 분강 한 가운데 '자리바위'에 촛불을 켜니, 강물은 여기서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 곁으로 흐르고, 아래에 퇴계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뗏목'에 올려 흘려보내니 경호(퇴계의 자)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중거(황준량의 자)의 무리들이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했다."


"농암상공께서 성주와 황을 불러 천석에서 유상하시고자 했지만 그날 비가 와서 성주는 왔으나 황은 가지 못했다.


며칠 취 다시 부르셨다. 황과 중거 및 여러분이 배를 띄워 '자리바위'에서 놀음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날 강각에 유숙했는데 상공계서 시로써 그 사실을 기록해두었다."


강각은 1544년, 애일당 남쪽 분강의 강가에 농암이 지은 집으로,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곳에는 퇴계뿐만 아니라 김안국, 이언적, 주세붕,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의 많은 명현들이 함께했다.


그런 분위기의 풍류에서 나온 작품이 농암의 어부가였다.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의 속어부사, 이형상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웅조, 18세기 권두경, 19세기 이휘영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 밝혀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에 송순-정철로 이어지는 호남가단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농암은 명예를 버려 명예를 얻었다. 강호지락은 곧 인생의 행복이었고 그런 생애가 문학을 낳았다.


문학은 강호지미로 나타났고, 거기 인간지락이 있었다.


퇴계는 농암이 거니는 경관은 진경이며, 농암의 강호유상은 진락이며, 농암은 진정 강호를 이해한 진은 이라 했다.


국문학사에는 농암을 '강호가도의 창도자'라는 도남 조윤재 박사의 언급은 유연이 아니며, 퇴계의 문학은 여기서 다시 이기철학이 스며들어 철학적 사유가 곧 시적 변용이 되는 피안의 경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다.


강호지락의 낭만적 미의식과 이기절착의 학문적 사색이 깊이를 더해갔으니, 거기 우리고유의 진정한 문화의 도, 풍류가 있었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심녹수, 돌아보니 만첩청산,


열 길 티끌세상에 얼마나 가렸는다.


강호에 월백하거든 더욱 무심하여라.



'어무장가 9장 가운데 그 9장은 이러하다.



한 번 낚싯대를 들고 배에 오르면,


세상의 명예와 이익은 아득히 멀어지나니,


배 붙여라, 배 붙여! 배를 매고 보니 지난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구나.


찌그덩, 찌그덩, 엇 샤!


엇-샤! 소리에 강산은 더욱더 푸르러 가네.



지금 강각 마루에는 유명한 농암가와 농암,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시가 게판 되어 있다.


1544년 화재가 예방하여 지은 시는 린, 빈의 어려운 운자에도 불구하고 농암, 퇴계가 차운했는데, 선현들의 빼어난 인품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출처: 농암종택 강각 안내문)




자연이 곧 한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긍구당과 엇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규모가 훨씬 크고 웅장합니다.



사방이 문으로 되어있어요.



여름에 참 시원할 듯 합니다.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강각입니다.


애일당


강각에서 보이는 애월당



강각에서 보이는 낙동강





힘이 느껴지는 멋스러운 강각의 현판



짜맞춰진 대들보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한옥의 과학적이고 멋스러운 모습



왼쪽부터...




회재 이언적 선생의 시



바위 쌓아 정자 지은 분강 구비에.


천작의 아름다운 경치 유인을 붙였네.


농암의 경계는 진실로 세속을 넘었으니.


애일의 정회에서 진성을 본다.



햇살 빛나는 교외 언덕 푸름이 깔리고.


바람 이는 수면에는 푸른 물결 넘실넘실.


한나절 모시니 맑은 소리 즐거워.


각별한 술잔 자주 와도 싫지 않네.




농암 선생의 시



농암 벽지에 누가 찾아왔나.


감사가 놀랍게도 노인을 찾아왔네.


약속을 지켜 고금을 담론하니.


청정한 가운데 나물 안주가 고작.



온화한 바람에 버들은 눈트고.


얼음 속 물고기 비늘이 움직이네.


날이 저물어 이별이 서운한데.


순행은 짐작컨대 자주 있지 않으리.




퇴계 이황 선생의 시



기이한 바위, 가경을 얻었으며.


지극한 도는 이미 속인을 넘었다네.


정자는 고요하여 주역을 읽을 만하고.


대는 명랑하여 진성을 이을 수 있네.



창 앞 푸른 물, 거울 같이 맑고.


바위 위 노송, 굴피가 더덕더덕.


다행히 나는 가까이 살아.


모시고 산야를 왕래함이 잦다네




강각에서 보이는 강과 산과 하늘



멋진 풍경 잘 감상하고 즐기고 갑니다. ㅎㅎ



강각과 애일당은 화장실이 밖에 있어요.



나무의 색이 말해주는 세월의 흐름



농암종택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강각



좋은 풍경을 눈과 마음으로 담고 사진도 남기기 좋은 여행지의 숙소로도 추천 드려봅니다.



하룻밤의 좋은 추억, 

 

저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농암종택에서 경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

(지번: 도산면 가송리 612)


전화 054-84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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